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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가끔은 고장난 신호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모든 신호등이 꺼져 있다.
 대체 이 신호등들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 만화, <송곳>


 '솔직히 말하자면 

차라리 운전대를 못 잡던
 어릴 때가 더 좋았었던 것 같아
 그땐 함께 온 세상을 거닐
 친구가 있었으니.'


 - 어느 가수의 노래, <신호등>
 

- 9.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났어?"

 E의 질문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것이었다. E는 막바로 자기 자신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요즘 잠을 잘 못 잤고, 생각이 많아졌으며... 그러니까, '정줄'을 잘 못 잡는 상태이긴 한데, 그래도 이 질문은 조금 무례하고 건방진 게 맞다. 마치 질문 앞에 (네들 주제에)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 같잖아.

 다행히 표 양은 오해하지 않았다.

 "뭐, 덕분에. 이런저런 조언과 도움 고마워."

 표 양의 대답은 예의 바른 것이었지만 E는 이번엔 불안감을 느꼈다. 

 사라졌다.
 얘 특유의 활달함이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E는 최대한 무심한 동작으로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크-. E는 커피보다는 술에 더 어울리는 추임새를 내뱉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표 양은 말했다.

 "E. 이따가 시간 어때?"

 "응?"

 "밥이나 먹자. 좋은 데를 알고 있어."

 "...밥까지 사 주는 센스. 표 양, 성공할 거야."

 E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지만 이번에 표 양이 보인 반응도 E를 불안하게 하기 충분했다. 

 "그럼. 수업 끝나고 정류장에서 봐."

 여덟 시 경, 벌써부터 짙은 어둠이 내려 앉은 초봄의 저녁은 E에게 오히려 안정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추위가 많이 풀려 안온했고 미풍은 E의 앞머리를 간지럽혔다. 설레이는 계절이 오고 있다. 조금 성미 급한 이들은 벌써부터 찐한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오늘...

 표 양은 한산한 정류장 벤치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오늘... 맞다. 쟤가 지금 작정한 것이다. E는 설레이는 기분이 조금 더 고조되는 것을 느끼며 표 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잠깐 잊었던 불안감이 다시 떠올랐다. 

 화장을 하는 표 양의 손동작을 보며, E는 마치 저 행동이 '억지로' 한다는 기분을 받았다. 왔다. 대혼돈의 멀티버스. 예전에 어느 웹툰에서 본 대사가 생각났다. 

 "왔어?"

 표 양은 밝게 웃으며 E를 맞이했다. E도 마주 웃었다. 셔틀버스가 왔고, 둘은 나란히 앉았다. 한산한 버스 내 분위기는 고즈넉했다. 창 밖으로 밤바다 풍경이 펼쳐졌다. "오늘따라 신호등이 왜 이래?" 버스 기사의 중얼거림이 E의 예민한 청각에 잠시 감지됐다. "여기서 내리자." 잠시 후 그들은 작은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에서 내렸다. 데이트 코스로 꽤 괜찮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표 양은 씩씩하게 앞장섰고 그들은 곧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하게 되어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와, 멋지다."

 E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고 표 양은 어깨를 으쓱했다. 곧 그들은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E는 말했다.

 "아하. 여기... '비건' 식당이군?"

 "맞아."

 "오, 요즘 인기네? 아니, 그런데 그렇다고, 응? 왜 매점 김밥에서, 햄을 뺀 거야, 응? 가뜩이나 부실하게 사는데."

 E는 짐짓 너스레로 말했지만 표 양은 웃지 않았다. E는 겨우 헛기침을 삼키며, 요즘 담배를 많이 피운 것에 대해 후회했다. 표 양은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불러 주문했고, 그 후 표 양과 E는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한 잡담을 했다. 어쨌든 공연을 잘 마쳤으니 축하. 아까 잠시 댓글 봤는데 아주 난리 났던데? 막상 나는 스태프라 잘 못 봤는데 네가 그렇게 연기 연출을 잘 하는지 미처 몰랐네. 고마워. 네가 도와줘서 그래. 오늘은 답례야. 맛있게 먹어. 공연이 끝나니까 조금 허무하기도 하네. 다 그런 거지. '연극이 내리고 난 후' 라는 노래도 있잖아. 잠깐, 제목이 이게 맞나? 응? 글쎄? 내리고가 아니라 끝나고 아닌가?

 곧 음식이 올라왔고 E는 '데코'에 한 번 더 감탄한 다음, 한 입 떠서 먹었다. 표 양도 최대한 예쁘게 먹으려 노력하며 음식을 먹었다. 맛있었다. 좋네. 분위기. 아까의 불안감 같은 것들은 그저 내가 표 양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느꼈던 착각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E는 자신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자각했고, 표 양이 그 모습을 몰래 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어쨌든, 친하면 상대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곤 한다더라. 사실은 평생 가도 모른대. 

 설레이는 봄밤, 어쩌면 나도 오늘... 
 '나'에서 '우리'로

 그러나, E는 잠시 후, 엄청난 당황을 느껴야 했다. E는 떨리는 손으로 표 양에게 티슈를 연신 건넸다.

 눈에 고이던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그리고 한 번 시작되자 그 울음은 아주 표 양다운 기세를 발휘했다. 표 양은 예전의 표 양으로 돌아왔다. 

 대성통곡하는 표 양의 말을 E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대체,
 우리 팀은
 아니, 나는,
 대체 뭘 한 걸까
 으아아앙! 엄마아!



 - 10.

 "운다, 저 여자."

 "좋았어. 일단 킵해두자. E, 지금 핫한 배우 및 연출가 표 양과, 험악한 분위기 조성, 뭐 이 정도 기조. 표적 취재 논란 안 생기게. 일단 킵."

 "표 양이 지원금 받았었죠?"

 "구미에 맞으셨겠지. 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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