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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툭 치면 쓰러질 것 같다.

 지나가는 행인은 E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자신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E는 그저 집을 향해 무던히 걷고 있었다. 캠퍼스에서나 거리에서나 E는 주의력을 혹사시켜가며 행동해야 했고, 그것은 실로 전장에 홀로 남겨진 병사 같은 모습이었다. 어깨가 굽었다, 고 E는 자각했다. 아이고, 가까스로 알아차렸다.

 이게 대체... 언제까지...

 E는 발걸음을 약간 돌려 단골 가게로 향했다. 얼마전부터 벼르고 있었던 우리 고유의 전통 음식이 생각난 것이다. 지글지글한 소리와 함께 반죽을 노릇노릇하게 부치면 그 향긋한 풍미와 바삭바삭하고 말랑한 식감... 그제서야 E의 입가에 조금 군침이 돌았고, E는 자신에게 불어온 미약한 소생의 활력에 감사했다. 

 - 喪中, 사흘 후에 엽니다. 
   03. XX. -

 "......"

 E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만약 신(神)이 있다면, 그는 막강한 힘으로 인간을 이리저리 가지고 놀며 그 반응을 즐기는 중이리라. E는 신성 모독적 사고를 마음대로 가동하며 하릴없이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주 오는 일련의 패거리들과 마주했을 때 E는 자신에게 더 이상의 기(氣)가 없음을 깨닫고는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졌다.

 "술 그렇게 처먹으니까 대장암 걸려 죽을 거야!"

 "요즘 담배도 많이 피운대!"

 "폐암, 시발!"

 "아하하하! x신 새끼!"

 E는 비틀, 하고 쓰러질 뻔했다. 지팡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되었다. 세상에 스태프 없이 배우가 있을 수 있나.

 "걔 걷는 것도 좀 '장애인' 같지 않냐?"

 언제나 E를 대놓고 모욕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여기서 E가 따지고 들어가면 그들은 발뺌하면 그만이며, 심한 경우엔 '피해 망상' 따위의 단어를 들먹일 수도 있다. 악(惡)은 마음[心] 위에 어떤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상태다. 그들이 거의 항상 형성하는 '패거리'도 그 중 하나일 수 있다. 

 나중에 서로 잡아먹을 게 분명한 저 패거리...

 E는 아픈 마음을 부여잡으며 꾹 참고 지나갔다. 아마 오늘은 막걸리를 세 병은 쏟아부어야 잠들지도 모른다. 그... 영감님... 아까 멋대로 욕해서 죄송합니다만, '그 책'에서 쓰인 고풍스러운 대사를 인용하자면-

 -대체 언제까지니이까...
 
 ...아오, x발, 
 대체 이게 뭡니까
 아 진짜 
 지옥같

 "지금 뭐라고 했냐?"

 E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뭐지? 내 마음을 읽었나? E는 이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어둠 속에서 등장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러자, 총 네 명이던 그들이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한 녀석은 갑자기 확 쪼그라져서 다른 녀석 뒤에 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녀석들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지금 뭐라고 했냐고."

 호랑이가 걸어오는 것 같다. 패거리 중 한 녀석이 나섰다.

 "그냥 우리끼리 얘기하는 건데? 시비 거냐?"

 대본에 있는 말이지.

 "피해망상인가 봐."

 "병... 바보."

 E는 이 난국을 저 '친구'가 어떻게 돌파할까 관심이 쏠렸다. 여기는 웬만한 논리(論理)로 공격할 수 있는 전장이 아니다. '소문'은 비논리성을 자신의 몸에 철갑처럼 두른다. 송곳이 어지간히 날카롭지 않은 이상...

 "암환자가 x신이야?" 

 "...뭐?"

 "'장애인' 같이 걷는 게 뭐지?"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내 친구 중에 암 투병하는 애 있는데, 존나 빡치는데?"

 E야, 머리 좋고 똑똑한 E야,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너는 스스로 함정에 빠진 것도 있었던 셈이다. E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호랑이는 안에서 밖으로 퍼져 나가는 형태의 기를 발산하며 패거리들에게로 점점 다가갔다.

 "니들 '생공'(생명공학과) 놈들이지?"

 "......"

 "생공 놈들이 말하는 싸가지 봐라? 내가 필드에 계신 생공쪽 선배들을 좀 알거든?"

 "...아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 녀석이 거짓말같이 허물어 진 것이다. 그 녀석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으아앙!" 

 그는 그 녀석을 조용히 응시하고는,

 "더 빡치기 전에."   

 '패거리'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한 녀석이 미련을 못 버렸는지 다시 나서려 했으나 '친구'는 이제 팔을 걷어붙이는 동작을 취함으로써 기꺼이 싸울 의사가 있음을 시사했다. 

 결국 그들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E."

 "......"

 그는 E에게 다가왔다. E는 조용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밥 먹었냐?"

 "...아니."

 "좀 먹어. 하긴, 왜 네가 요즘 잘 못 먹는지 짚이는 게 있지만."

 "...왜지?"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배고프다."

 "흠..."

 "가자. 내가 살게."

 

 

 

 - 14.

 

 이런 가게가 있었군.

 E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가게는 토속적이면서도 정갈한 내부를 가지고 있었고 따스하고 낮은 조명은 안온한 분위기를 선사했다. 이런 가게를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잠시 후, 노릇노릇한 김치전이 술상에 올라왔다. E는 드디어, 하는 생각에 눈물까지 핑 돌 뻔했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밤바다에서는 별빛이 빤히 내리고 있을 것이다. 둘은 잔을 들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신변 잡기부터 시작해서, 아직 채 여물지 않은 철학적 주제 - '사랑이란 무엇이냐',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 신학적 주제 - 선악과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 정치학적 주제 - 왜 조 교수님은 해고되어야 했나 - 그리고 여러 학문의 융합까지 - '정말로 김 교수님이 조 교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란 무엇이냐'  등을 주제로 삼아 열띤 수다를 펼쳤다. 

 술이 얼근히 취했다. E는 문득, 이런 기분 좋음은 참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행복, 오, 영감님... 아깐 죄송했습니다. 

 "내가 봤을 때, 조 선생님은 김 선생님에게, '원(圓)'이야."

 친구가 말했고, E는 전을 오물거리며 대답했다.

 "원? 써클(circle)?"

 "어. 써클."

 "웬 원이야?"

 "가장 아름다운 형태니까."

 "...그럴 듯해."

 "세상에 완벽한 원은 없지. 하지만 아름다운 원은 있지."

 "흠."

 "팔방미인(八方美人)이지."

 "분위기가 있으시지. 언제 봐도."

 그리고 둘은 쭉 들이켰다. 둘 다 속상한 마음을 달래려는 의도가 보였다.

 다시 친구가 대화를 이어갔다.

 "그 원이 회돌이당해서 이리저리 납작해지는 것을 보시면서, 가슴이 아프셨을 거야."

 "'회돌이'가 뭐지?"

 "사방에서 그냥 마구 공격하는 거야. 바둑에서. 그래서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아하... 어어?"

 어어?  

 김치전이 하나 더 나왔다. E는 납작한 김치전을 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반죽을 눌러서, 잘 부쳐서 '전'을 만든단 말야..."

 "그렇지."

 "이게, 사실은 거품(bubble)을 누르는 거지."

 "그렇지."

 "거품은 누르면 터질 뿐이지만, 김치는 누르면 새어나올 거야."

 "그러니까 맛있지."

 "흠."

 "여기 김치전 맛있지?"

 "대박. 어느 시인이 '김치는 사랑'이랬는데."

 "다음에 또 오자."

 E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또 몇 순의 술잔이 오갔다.

 잠시 후, E는 꼬부라진 말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아, 취했다. 아무래도 말야..."

 "아무래도 뭐... 딸꾹."

 "윽... 그러니까, '써클'을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무 ㅓ 라고? 좀 천천히 말ㅎ ㅐ."

 "야, 너 취했냐?"

 "안 취했어. 근데 너 진짜 술 겁나 세네."

 "지금 졸려 죽음."

 "생각해- 놓은, 친, 친, 친구들이 있ㄴ ㅑ-?"

 E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막걸리를 들이키는 E의 졸린 눈은 꽤 가지런했다. 

 E는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특정 누구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친구와 작별하고 E는 그저 조용히 돌아와 자신의 집 옥상으로 올라갔다. 밤바람이 E의 앞머리를 간지럽혔다. 뜨거운 얼굴이 상당히 시원해졌다. 오늘은 조금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더 이상의 술은 안 마셔도 되겠어.

 멀리서, 파도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
 - 마피아 게임 - 장외(場外) - 어디에나 '경찰'이 있다 

 - 완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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