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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9. 12. 24.

 글쓴이 : 철망앞에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이 있다. 저번 포스팅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글을 인용했는데, '그것은 소수라고도 할 수 없다'는 문장은 전력을 다하는 소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저항하지 않는 무기력한 소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내가 과문하여 착오가 있었다. 죄송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지하철 2호선 강섬역을 찾았다. 서울에서 가장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다. 거리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강섬역 부근. 연인들과 친구들과 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 한가운데, 고공 농성을 하는 자가 있다.

 

 외로운 바람, 외로운 공기, 외면하는 행인들, 그 한 가운데, 그는 높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다. 하늘이 잿빛으로 물든다. 땅은 선득한 형광으로 빛난다. 몇몇 이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어 예배 집회를 드린다. 집회 사회자가 한 가수를 소개했다. 검은 뿔테 안경에, 머리를 넘겨 질끈 묶고, 자기 몸집만한 기타를 메고 나온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희영'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그녀는 노래를 시작했다. 여리여리한 체구에 걸맞지 않은(?) 엄청난 성량이었다. 나는 잠시, 홀린 듯이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

 

 이건... '진혼곡'이다. '장송곡'이다.

 

 나는 그녀의 담담한 노래 속, 폭발하는 흐느낌을 느꼈다. 노래가 끝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홀린 듯이,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나는 곰곰 생각하며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집에 오면서 내 결론은 한 가지로 수렴되고 있었다. 하루에 열 다섯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세 명씩 일터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나라에서, 아마 그들을 위한 노래이리라. 그렇게, 결론내었다.

 

 죽음은 외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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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블로거의 글 - 아가씨를 위한 장송곡 (완결)

 2020. 0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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