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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暗行)

4화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새벽 네 시가 다 되어가건만 이들은 밤을 잊은 듯 하다. 희영은 흘러내린 뿔테 안경을 그대로 둔 채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양복 입은 아저씨들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바쁜 발걸음으로 움직이고, 쉴새없이 무대 세트며 짐차들이 왔다갔다하고, 자판기 앞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한 숨 돌리고 있는 두 남자, 그들의 곁으로 미녀들이 지나가자, 두 남자는 그녀들의 몸을 슬쩍슬쩍 곁눈질했다.

 희영을 포함하여 사십 여 명의 단역출연자들은 지금 촬영 대기 중이었기 때문에, 제각기 편한 자세로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지, 음악을 듣던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희영이 보기에는 그들도 분주해보였다. 희영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음이 분주한 것이다.

 희영은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바람이나 쐬러 홀 바깥으로 나간 희영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폈다. 졸려 죽겠다. 졸려서 이제 책도 못 읽겠어. 희영은 이번에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안경을 살짝 들어올려 눈물을 닦았다. 그래서 어떤 남자가 곁에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피곤하죠?"

 희영은 옆을 돌아보았다. 이런. 꽤 잘 생긴 남자가 희영에게 음료수를 건네고 있었다.

 "드세요."

 "......"

 희영은 음료수를 받으며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남자는 희영의 눈길을 부드럽게 받으며 미소를 띄었다. 희영은 어느새 또 흘러내린 안경을 올려쓰며,

 "무슨 용건이라도..."

 "네. 사실은..."

 남자는 말을 얼버무리더니, 약간 쭈뼛쭈뼛했다. 희영은 남자의 그런 모습을 보며, 이거 혹시 그린라이트? 라고 생각했다. 이런. 화장도 대충 하고 나왔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희영은 괜히 도도해보이고 싶어서, 여유로운 동작으로, 음료수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남자는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띄며,

 "사실은... 저는 캐스팅 디렉터 은성수라고 합니다. 아까부터... 님을 유심히 지켜봤는데, 저희가 원하는 이미지랑 딱인 것 같아서..."

 하고 품에서 명함을 꺼내 희영에게 건넸다. 희영은 그 명함을 받아 유심히 바라보며,

 "캐스팅... 디렉터?"

 "님... 혹시 배우 하실 생각 없으신가요?"

 이게 말로만 듣던 길거리 캐스팅? 희영은 괜스레 볼이 발그레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비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은 희영의 인생을 관통하는 말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친한 친구가 연극영화학과에 간다고 하자 자신도 같이 원서를 넣었다. 어찌어찌 붙었다. 대학에서 연극을 할 때 희영이 맡은 배역은 주로 '시녀 1', '요정 1' (키가 작아서) 등이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친구 따라 공모전도 해 보고, 회사에 들어가 인턴 생활도 하고, 서빙 아르바이트도 했다. 한번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어떤 친구가 희영에게 물었다.

 "너는 진짜 하고 싶은 거 없어?"

 희영은 대답하기 곤란했다.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연극을 하면 나름 재미있고, 광고 공모전도 재밌었고... 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그러자 그 친구는 충고쪼로 한 마디 했다.

 "꿈을 좀 가져 봐. 맨날 책만 읽지 말고."

 

 나는 꿈이란 게 없는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 하세요?"

 남자가 물었고 희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내가 또 멍하게 있었나 봐. 갑작스럽게 생각에 빠져드는 것은 희영의 버릇이었다. 희영은 고개를 휘휘 저은 다음,

 "무슨 작품인데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띄며,

 "이번에 저희가 제작하는 영화인데요, 제목은 알려드릴 수 없고... 일단 저희 차에 가서 이야기 좀 하시죠."

 "우와..."

 남자가 가리킨 것은 연예인이나 타고 다닌다는 으리으리하고 큰 차였다. 저걸 뭐라 그러더라? 하여튼, 차 유리가 썬팅이 되어 있어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그런 큰 차 말야. 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을 것 같았다. 남자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소 사무적인 동작으로 희영을 차 쪽으로 이끌었다.

 차 안에는 두 남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잘 다려진 까만 정장을 입고, 번쩍번쩍 광이 나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희영은 자신의 책을 옆에 내려놓고, 정장 치마를 잘 갈무리하며 예의바른 자세로 앉았다. 차 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잠겼다.

 두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희영은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한 남자가 입을 뗐다.

 "예쁘시네요."

 "......"

 희영은 여전히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른 남자가 입을 뗐다.

 "얼굴도 희시고..."

 희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자는 이제 별로 할 말이 없는 듯 했다. 침묵이 좌중을 휘감았다. 희영의 멍한 표정을 바라보던 한 남자는, 참다 못했는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약 기운이 아직 안 도나?"

 희영은 여전히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른 남자가 말했다.

 "아, 씨발, 그 새끼 일처리 존나 못하네."

 "아. 모르겠다. 그냥 덮쳐."

 한 남자가 희영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여리여리한 희영의 모습을 보아 당연히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오산이었다.

 희영은 오 센티미터 굽의 하이힐을 신은 발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남자를 걷어찼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차 시트에 파묻혔다. 뜻밖의 사태에 다른 남자가 경악에 찬 눈으로 희영에게 달려들었다. 희영은 자신의 책을 들어, 책 모서리로 남자의 정수리를 찍었다.

 순식간에 두 남자가 기절했다.

 미안. 나는 예전에 운동도 참 재밌었어.

 희영은 뒷맛이 씁쓸한 것을 느끼며 잠긴 차 문을 열려 했다. 어떻게... 여는 거야? 한참을 헤매던 희영은 겨우 차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아까 그... 캐스팅 디렉터 - 사기꾼이겠지만 - 놈이 희영의 앞에 있었다. 그 놈은 차 안을 휘휘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희영은 남자에게 말했다.

 "비킬래요?"

 남자는 비키지 않았다. 희영은 남자를 밀쳐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몸이 비틀렸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희영은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마치,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희영은 득의만면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를 보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을 뚫고 이 곳으로 오는 한 여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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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暗行)

4화

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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