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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暗行)

3화

 수철을 비롯한 사십 여 명의 단역 출연자들은, 세 시간 째 대기 상태로 있었다.

 얼마 전 막을 내린 공연은 수철이 연극을 시작한 이래 가장 행복한 공연이었다. 두 달여에 걸친 연습 기간 동안 수철은 사십 페이지 가량의 대본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고, 연출이 주는 디렉션을 수행하기 위해 무대를 구르다시피 연습했다. 동료 배우와 의견 충돌이 있을 때면, '참을 인'자를 되뇌이며 근엄하게 처신했다. 그에게 '첫 주연'이란 하늘이 내려주는 축복 같은 것이었다.

 보름에 걸친 공연 기간 동안 수철은 관객들로부터 환호와 찬사를 받았다. 비록 몇 안 되긴 했지만 중소 언론사에서 취재를 오기도 했다. 수철은 연극을 하길 정말 잘 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여섯 해 동안 연극을 하며 배고팠던 일과 서러웠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막공이 끝난 후, 수철은 정체모를 허무감에 사로잡혔다.

 뒷풀이 회식 때 수철은 술을 진탕 마셨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나고 마음이 허했다. 급기야 동료 배우들은 수철을 보며 그만 좀 마시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수철은 안주로 나온 홍어 무침을 손으로 집어 먹고, 고래고래 고성을 지르며, 연습 기간 내내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던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얼 위해 그리 열심이었나...

 며칠 후, 수철은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했다. 생활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사판 노가다, 연회장 서빙, 택배 상하차 등, 그가 하는 일은 주로 일급 형태로 돈을 주는 곳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드라마 단역 출연을 위해 자정부터 방송국 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단역 출연의 경우에는, 잘만 하면 제작자들이나 감독들의 눈에 띌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눈 돌릴 수 없는... 희망이었다.

 수철은 졸린 눈을 비비며, 자판기 커피라도 뽑아먹을 요량으로 일어났다.

 대기 시간도 시급으로 쳐 주니 다행이긴 하지만. 수철은 다시 한 번 눈을 비비고, 커피 자판기로 다가갔다. 그리고 커피 자판기 옆에 있는 음료수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고 있는 두 남자를 흘깃 보았다. 그들은 목장갑을 손에 끼거나 들고 있었다.

 무대 인력인가 보군. 수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동전을 꺼내기 위해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그 두 사람 중 한 남자에게 눈길이 갔을 때, 멈칫했다.

 저 사람...

 수철은 재빠르게 커피를 뽑고 자리로 돌아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바닥에 내려놓고, 그는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검색했다. 곧 핸드폰은 친절하게 검색 결과를 화면에 띄웠다. 수철은 그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한 링크를 클릭했다.

 '...그들은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기성 정치권과, 이를 포획한 경제계, 그리고 이들의 하수인이 된 언론계가 그들을 애써 외면하거나, 조롱하거나, 노골적으로, 또는 우회적으로 핍박할 때도, 그들은 암약(暗躍)했다. 그들은 스스로 병듦으로써 세상의 병듦을 드러낸다. 그들의 규모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소수, 또는 극소수다. 하지만 소로(Thoreau)의 말마따나 전력을 다하는 소수는 이미 소수라고도 할 수 없다...'

 “안녕하세요.”

 수철은 깜짝 놀라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단역 배우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수철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다가, 이내 친절하게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뭐 해요?"

 “아, 네, 뭐... 그냥 심심해서...”

 “난 아저씨 아는데.”

 “어, 그래요?"

 “연극 봤소.”

 “아하. 감사합니다.”

 “나도 예전엔 극단 생활을 좀 했어요. 나름 청운의 꿈을 꾸고 있던 배우였지. 후후.”

 "선배님이시네요. 하하."

 "뭐, 지금은 아니니까."

 “오늘도 연기하러 오신 거군요?"

 “아니죠. '병풍'을 하러 온 거이지."

 하며 그는 자신의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수철은 이제 별로 할 말이 없어서 머리만 긁적였다. 아저씨 배우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해요. 요즘 세상에 불만이 많아서 좀 세게 말했소."

 "괜찮습니다. 그럼 선배님은 요즘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요? 편의점 알바요."

 "아하..."

 "연극을 하다가 생활고에 맞닥뜨렸지요. 눈물을 머금고 연극을 접고는, 그리고는 회사 들어가서 한 몇 년 구르다가, 잘렸소. 그때는 술을 엄청 마셨던 것 같아요. 마누라는 도망 가고..."

 "......"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했죠."

 "......"

 "언젠가는 다시 연극을 할 겁니다."

 수철은 그의 희끗희끗한 머리를 다시 바라보며, 문득 궁금했다. 경력이 단절되고, 연세도 꽤 있어 보이시는데 연극을 다시 한다고 하면 받아주는 곳이 있을까? 그리고... 배우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

 수철은 질문했다.

 "왜 연극을 다시 하고 싶으세요?"

 그냥 으레 던지는 질문을 던진 거다. 넌 왜 연극을 하니? 무대 위에 있을 때 행복해서요. 관객들의 환호를 받는 게 좋아서요. 연극을 할 때 살아 있는 걸 느껴요.. 뻔한 대답이 나오겠지. 수철은 이 아저씨 배우의 대답을 듣고 대화를 마무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가 흰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기며 대답했을 때, 수철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가락을 두둑 꺾었다.

 "연극은 나를 독하고 천박하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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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暗行)

3화

2019.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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