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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내리는 밤 -

 

 아직 밤 아홉 시가 안 되었는데 상점의 불들이 모두 꺼져 있었다. 쇠락한 상점가다.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비도 피할겸 나는 식당을 찾았다.

 어깨가 다소 축축히 젖을 무렵, 겨우 작은 식당을 발견했다. 몸에 묻은 물기를 털며 식당 안으로 들어서니, 어떤 덩치 좋은 아저씨 한 분이 홀로 식당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건네며 나에게 인사했다. 그 미소에는 서울에서는 잘 만날 수 없는 따스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인심에 감사하며 마주 인사하고, 김치찌개에 소주 한 병을 시켰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 오르는 김치찌개가 차려질 무렵, 빗방울은 거세게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가랑비 수준에서 그칠 것 같았는데 어지간히 큰 비였다. 무기력을 떨치기 위해, 간단한 짐만 챙기고 무작정 떠나오다보니 우산을 깜박했다. 나는 김치찌개를 한 술 뜨며, 우산을 살 수 있는 편의점 위치를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았다. 6.4km 떨어져 있었다.

 "비가 많이 오네요."

 그가 웃으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내 표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우산 있어요?"

 나는 난감하다는 듯이 웃으며,

 "아니요."

 "여기 사람이 아니네?"

 "어떻게 아셨어요? 서울에서 왔어요."

 "하하. 여기 사람 아니면 확 티나요. 왜 왔어요? 여행?"

 ", ..."

 "흐음. 뭔가 심란한 게 있구나."

 족집게네. 나는 그의 내공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잔에 소주를 따라서, 쭉 들이켰다. 아저씨가 그런 나를 보며,

 "저도 서울 살았어요."

 한바탕 ''을 풀 생각임을 알려왔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마침 심심했던 참이다. 아저씨는 나의 웃음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서울에서 크게 사업했는데. 빌딩도 몇 채 있었고."

 "."

 "그런데 망했어요."

 "왜요?"

 "글쎄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하고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말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았다. 나는 사과했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렇게 돈을 다 날리고 나니까, 멘탈이 못 견디더라구요. 그래서 우울증 약을 달고 살았어요."

 나는 뜨끔했다. 하지만 솔직하기로 했다.

 "저도, 먹어요."

 ". 그렇군요. 힘들면 상담 받아봐야 해요. 약 먹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

 "저는 그때, 사람들이 모두 미웠어요. 사람이 답답하잖아요? 그러면 주변 사람 붙잡고 막 하소연한단 말이에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거죠... 그러면 사람들이 들어주긴 해요. 그리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 와요."

 하고 그는 말을 멈췄다. 왠지 오늘 소주가 필요한 쪽은 그 쪽인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나는 6.4km 떨어진 편의점까지 택시를 타고 갈 경우 나올 택시비를 계산하고 있었다. 이렇게 돈이 깨지는구나.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그런 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 조언들은... 나뭇잎 정도란 말이에요."

 "나뭇잎이요?"

 "그래요, 비는 세차게 오고, 나는 그 비를 온통 맞고 있는데, 나뭇잎을 건네 주는 거란 말이죠."

 그렇게 비유할 수도 있구나. 나는 내가 항우울제를 먹기 전, 원통한 가슴을 움켜쥐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여섯 해 전의 나를 생각했다. 하소연할 친구가 없었나, 그건 아니었다. 친구들은 이것저것 조언을 해 줬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나의 가슴은 속절없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겨냈어요?"

 그러자 아저씨가 씩 웃었다. 역시, 사람 좋은 미소였다.

 "비를 같이 맞아주는... 별로 친한 친구도 아니었는데... 흐흐. 그 한 사람 때문에..."

 "......"

 나는 소주 한 잔을 다시 쭉 들이키고, 아저씨에게도 한 잔을 건네었다. 그는 그래, 오늘 장사 접자, 하고는 역시 쭉 들이켰다. 방금 전까지 나에게 수심을 안겨주던 빗소리가, 아름답게 들렸다.

 우리는 각자 소주 한 병씩을 비우며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아저씨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는 잠시 후 낡은 우산 하나를 들고 나왔다.

 "쓰고 가세요."

 "...고맙습니다."

 이번 여행은 의외의 성과가 있었다. 맞아, 이런 의외의 성과 때문에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지? 원래 인생이 그런가? 나는 그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다음에 꼭 또 오겠노라고, 그때 또 한 잔 하시자고, 그러고 나왔다. 그는 나를 문 밖까지 전송하며, 손을 흔들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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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밤

2019.02.19.

낮아짐 이야기제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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