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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화 -

 

 

 

"이제 와 보니 저 녀석이 조금 불쌍하군."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멈춰섰을 때, 하나 녀석이 불쑥 말했다. 우리는 - 넷 녀석까지 - 모두 녀석을 쳐다보았다. 모두의 시선을 받게 된 하나 녀석은 다소 우쭐하여 말했다.

 

"저 녀석은 '학대'만 받다가, 버려졌지. 거의 고문에 가까운 괴롭힘을 당했다고 들었다... 녀석이 '빌런'에 집착하는 게 이제 이해가 되네."

 

넷 녀석이 붉게 충혈된 눈에서 빨간 물을 조금 흘렸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여전히 송곳니를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고 있는 살기등등한 모습이었기에 가까이 갈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변화가 생겼음은 틀림없다.

 

나도 꽤 어두운 과거사가 있긴 하다만...

 

하나 녀석은 앞으로 나섰다.

 

"어..."

 

뜻밖의 상황에 앞발이 스르르 올라갔지만 제지하기에도 늦었다. 무안하게 멈춰있던 앞발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셋 녀석은 입을 조금 벌리고 있었고 둘 녀석은 중얼거렸다.

 

"...소 뒷발에 채인 것도 성과라면."

 

꽤 신랄한 말이어서 나는 이 녀석들의 정체를 다시 곱씹게 되었다. 어쨌든 저 소 뒷발에 채인 것으로 '고기'를 먹은 적이 있었던 것 아닌가? 하나 녀석은 둘 녀석의 중얼거림은 듣지 못했는지 계속 나아갔다. 우리가 확보한 안전거리를 과감하게 무시하며 나아간 녀석은 만약 넷 녀석이 급작스럽게 돌진한다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지척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하품을 한 다음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많이... 힘들었지?"

 

셋 녀석의 입이 이번엔 떡 벌어졌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아마 저런 다정함이 익숙하지 않은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나 녀석은,

 

"알아, 그동안... 애들이 너를 무시하고 멸시한 것. 맨날 빌런 타령만 한다고 구박했지."

 

"......"

 

둘 녀석은 입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나는 네가 왜 그동안 빌런 타령을 했는지 이해가 간다."

 

"...크르르..."

 

"돌아와라. 언젠가 같이 바다에 갈 날을, 같이 꿈꾸자."

 

"...으르르..."

 

넷 녀석의 흉흉함이 많이 수그러진 것이 눈에 띄었다. 효과가 있었나 보다. 이거, 굳이 해치님이 오시지 않아도?

 

"...으으으..."

 

"그래. 착하지..."

 

"으으으아..,"

 

넷 녀석은 이제 기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하나 녀석은 그런 넷 녀석을 아기 강아지 다루듯 다독였다. 덩치 큰 들개가 응석을 부리는 모습은 기이했지만 그게 본연의 모습인 것도 같았다.

 

"으으... 으으아!"

 

"우쭈쭈... 그래."

 

어, 축귀(逐鬼)가 이렇게 성사되나? 소 뒷발에 채였어도... 매서운 비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넷 녀석은 이제 아기 강아지처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노래'를 기막히게 부르는 한 녀석을 알고 있다. 그 녀석은 노래를 상당히 구성지게 부르지만, 지금 넷 녀석의 노래는 그저 해맑았다.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어딘가 구슬프면서도 듣기 좋았다. 우리는 모두 조심스럽게 미소지었다. 하나 녀석만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셋 녀석을 바라보았다. "뭐람. 징그러." 셋 녀석은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밉지 않게 하나 녀석을 흘겨보았다.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바다...

 

"팔 베고 스르르르..."

 

노래가 거의 끝나간다. 나는 이제야 몸의 긴장을 풀며 스르르 쓰러질 채비를 했다. 다음 말이 나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잠이 듭니- 엄마, 어디 갔어? 어디 갔어?"

 

"......"

 

목 뒤쪽이 확 잡아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셋 녀석은 작게 헛바람을 삼켰고 둘 녀석은 하나 녀석을 바라보았다. 하나 녀석은,

 

"?"

 

하고 어쩔 줄 몰라하더니,

 

"이봐아, 넷."

 

하고 넷 녀석을 불렀다. 넷 녀석은,

 

"엄마... 어디 갔어, 어디 갔어요? 나 여기 있어."

 

하고 중얼거렸다. 이건 전혀 노래가 아니었다. 아기 강아지는 이제 흐느끼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보고 싶어요..."

 

"......"

 

"나 버리지 마요..."

 

넷 녀석은 이제 눈에서 빨간 물을 펑펑 흘렸고 입에는 거품을 물었다. 둘 녀석이 초조하게 말했다.

 

"야, 하나! 어떻게든 해 봐."

 

"내가 뭘?"

 

"네가, 책임-"

 

"이 새끼가 어따 대고!"

 

하나 녀석은 둘 녀석을 향해 으르렁거렸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넷 녀석은,

 

"엄마? 엄마! 나, TELE-VISION 만 보는 거, 지겨워요!"

 

"......"

 

"나 힘들고 무서워요..."

 

"...이런..."

 

"다... 다 죽어...!"

 

"고양아! 저 녀석을 막아!"

 

셋 녀석이 황급하게 외쳤다. 나는 움찔하여 넷 녀석을 바라보았다. 넷 녀석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도약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넷 녀석의 앞을 가로막은 다음, 온 몸을 부풀렸다. 그러자 녀석은 도약하지 않고 그대신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차라리 도약한 다음 우리와 육탄전을 벌이는 편이 우리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이 공포감에 비한다면.

 

"집 안으로 들어오는 빌런들이 고민이신가요? 이제 맡겨만 주세요! 따르릉! 따르릉! 얘, 아직도 빌런 손해 보험 안 들었니? 이것만 들으면 걱정 없어. 본 광고(廣告)는 심의 기준을 준수합니다. 야, 쟤 누가 데려왔어! 다른 애로 바꿔! 빌런같은 환경에도 부드러운 주행!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이 열매들은 무엇입니까?"

 

"내가 여기저기서 모아온 것들이네."

 

"흠? 한 번 먹어봐도 됩니까? 저기, '사과'도 있군요."

 

"알지? 저건 먹으면 안 된다."

 

"다른 것들은... 이런, 이렇게 많은 열매들이 있다니."

 

"호호, 이건 진달래 열매, 요건 원추리 열매, 장미 열매, 단풍 열매... 각각이 예쁘고 아름답지."

 

"왜 열매들을 모으시는 겁니까?"

 

"글쎄... 독처(獨處)하는 자의 외로움 때문일까."

 

"......"

 

"독방(獨房)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군."

 

"방(房)?"

 

"에그, 내가 또 넋두리를."

 

"괜찮습니다"

 

"간지, 이 열매들도 각각이 하나의 방(房)이라네. 얼핏 씨앗들을 가두어 놓은 것 같지만..."

 

"사실은 자양분들이군요."

 

"그렇지. 세상에 쓸데없는 것은 없지. 단지 필요한 건..."

 

 

 

"으으아아아악!"

 

기이한 언어들을 쏟아내더니 이제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주위에서 귀신들이 육시(六屍)라도 하려고 몸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녀석의 몸이 '들리고' 있었다. 셋 녀석은 겁에 질려 외쳤다.

 

"어떻게 좀 해 봐, 수컷 새끼들아!"

 

"우리가 뭘..."

 

하나 녀석은 얼버무렸고, 그러자 셋은 나에게 외쳤다.

 

"고양아! 뾰족한 수를! 쟤 저러다 몸 찢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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