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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에게

 

 - 여섯 번째 편지 -

 

 

 

 이제 우리는, 편지가 더 안전한 세상 속에서 살게 되었다…

 

 기술의 발전이 사람들에게 인식의 지평선을 넓혀 줄 것이라는 장밋빛 기대가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첨단 기술 문명에 푹 파묻혀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도시는 언제나 야만적인 정글과 다를 바 없으니, 정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를 불특정 다수에게 표현할 수 있는 여건에서 오히려 이분법적 사고는 더욱 심화되고 있으니, 이게 정말 어떻게 된 일일까?    

 

 그 친구에게 답장을 보냈어. 아마 지금쯤, 바닷가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내 편지를 읽고 있을 지도. 그들의 공연장을 지키는 일에 휘말리고 나서 후폭풍이 만만치않은 모양이야.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몇몇 친구들이 갑자기 좀비가 되었다.’ ‘학교에 암세포가 번지고 있다.’

 

 이제 기술의 발전은 좀비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방향으로, 의학의 발전은 암세포를 다시 정상 세포로 되돌리는 방향으로… 가능한가? 좀비든 암세포든 결국 숙주를 기반으로 자기 영토를 넓혀 나가는 거잖아? 그들의 영토를 다시 탈영토화하는 백혈구 같은 싸움꾼이 어디 없는가?

 

 내가 오늘 그 식당에 불쑥 들어간 이유는 꼭 배가 고파서 만은 아니야.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했는데, 나는 곧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어. 홀에서 혼자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계셨거든? 그 아주머니가 어떤 업무를 소화하는 지 내가 본 것만 나열하면, 전화 주문 받기, 배달 어플 주문 받기, 배달 음식 포장하기, 김밥 싸기, 음식 서빙하기, 손님 음식값 계산하기, 테이블에 있는 빈 음식 그릇 치우기 등인데… 혼자 하시기엔 조금 많아 보이더라. 아주머니도 지쳐 보이셨고. 그러니 사달이 나지.

 

 아주머니가 배를 움켜쥐고 쓰러지셨을 때, 나는 황급히 119를 불렀다.

 

 곧 구급대가 도착했고, 아주머니는 아주 심각해 보이진 않았지만 곧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어. 그리고 나는 주방에서 일하시는 다른 아주머니 두 분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

 

 “그러니까 한 사람 더 쓰지. 걔는 왜 짜르고, 왜 혼자만 독박쓰게 하냐고.”

 

 “김 여사가 원래 일을 잘 하고 착하잖아. 그러니까 부려먹기엔 더 좋아.”

 

 “가게 망할라나? 김 여사 저번에 월급 받았나? 쥐꼬리만한 거라도 받아야 약값하지.”

 

 “몰러. 어머, 몰랐어? 사장님 이제 이 가게 팔아치운대.”

 

 “어머, 왜? 그럼 난 어떡해?”

 

 “몰러.”

 

 먹튀하는구만. 나는 그렇게 아무렇게나 생각한 다음, 아주머니 두 분께 간단히 인사하고 음식값 계산하고 나왔지.

 

 그리곤 좀 걸었어.

 

 나는 지금 화가 나 있는 건가. 아니면 다소 울적한 것인가. 잘 모르겠는 채로, 좀 걷다가, 문득 그 친구가 보낸 편지를 다시 기억해 냈어.

 

 ‘한지훈 작가님. 제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사는 세계는 결국 무질서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가. 그 어떤 이념과 사상도, 결국은 엔트로피의 증가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가. 자연은 저렇게 조화로운데, 오직 인간만이, 마치 이 지구상에서 암세포처럼 활약하고 있는가… 그래도 인간만이 희망이라는 이야기도 이제 좀 상투적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획기적인 사상이나 이념을 또 발명해? 그럴 깜냥도 안 되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네요. 알베르 까뮈의 말이 맞습니다. 인간의 부조리함은 숙명입니다. 어느 쌤이 그랬는데,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 있기 때문에 인간 세계도 언제나 어느 정도는 기울어 있을 수 밖에 없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사방팔방으로 기울어 있는 것 같아요. 마치 사방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리듯…’  

 

 그리고 나는 목적지에 도착했어. 나의 목적지는 어떤 물리적인 공간은 아니었어.

 

 “이봐요, 아저씨.”

 

 그는 뒤를 돌아보았지.

 

 “젠장.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긴. 요즘 ‘미행’이 유행이라는데. 우리끼리도 네트워크가 있지롱. 내가 아는 한 전도유망한 기타리스트가…”

 

 “시발…”

 

 “이번엔 무슨 일인지 묻지 않을게요.”

 

 “왜지?”

 

 “뒤에 두 사람이 더 나타나서.”

 

 나는 뒤를 흘깃 보았어. 웬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가 내 뒤에 서 있더라고. 오늘 이렇게 또 하나 배우는구나.

 

 나는 아저씨에게 말했어.

 

 “갈아탄다더니. 갈아타긴 했나 봐요?”

 

 아저씨는 대답이 없었어.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곧 고개를 숙이고,

 

 “너… 많이 컸구나. 몰라 볼 정도로.”

 

 말만 들으면 무슨 극적인 부자 상봉이라도 한 줄 알겠네. 나는 콧바람을 내뿜은 다음,

 

 “아저씨는 좀 말랐네요. 그땐 퉁퉁했는데.”

 

 “살 빼고 있다.”

 

 “왜요?”

 

 “……”

 

 뭐야. 왜 대답을 못 해. 뭐가 부끄럽다고. 나는 한 번 더 콧바람을 내뿜으려다가, 도로 집어넣었어. 충격적인 말을 들었거든.

 

 “나는 모르겠다.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

 

 “차라리 너니까 더 안전하게 말할 수 있겠다.”

 

 나는 뒤의 두 사람을 보았어. 그 두 사람은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니라는 듯, 약간 고개를 끄덕일 뿐 무덤덤했어. 아니, 왠지 내 대답을 예의주시하는 것 같은…

 

 나는 내 친구들의 게토를 잠시 생각해 냈어. 소수자들의 따스한 연대와 차가운 돈의 논리가 공존하는 그 곳.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어.

 

 “당장 유리한 것만 찾으니까 헷갈리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아저씨는 되게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되물었어.

 

 “무슨 말이긴 무슨 말이야. 그냥 알아먹어요. 왜 이건 못 알아먹어.”

 

 “……”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마요.”

 

 “왜지?”

 

 “높은 확률로 틀릴 거니까.”

 

 “……”

 

 “그리고 남이 아저씨에 대해 하는 말에도 깊게 생각하지 마요.”

 

 “왜지?”

 

 “더 높은 확률로 틀릴 테니까.”

 

 “…왜 그렇게 틀리기만 하지?”

 

 왜냐고? 아저씨 네트워크 보면 그림 나오거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다음,

 

 “아저씨.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그러자, 아저씨는 굉장히 긴장한 표정이 되었어. 오늘이 무슨 날이지? 어떤 독립 열사가 돌아가신 날인가? 아니면 감옥에 갇히신 날?

 

 “오늘 화이트 데이야.”

 

 “뭐라고?”

 

 “화이트 데이 몰라요?”

 

 아저씨는 얼빠진 얼굴이 되었어.

 

 “아저씨,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

 

 “있으면 사탕이나 사요.”

 

 “화이트 데이에 사탕을 사는 건 자본주의 논리에 의한 상술…”

 

 “좆까지 말고 사탕!”

 

 나는 결국 소리를 빽 질렀어. 아저씨 뿐 아니라 뒤의 두 사람도 움찔했어. 나는 이번엔 콧바람을 마구 내뿜은 다음,

 

 “이제 갑니다. 미행해도 별 거 없죠? 차라리 가만 놔뒀으면 좀 실수도 하고 그랬을 텐데.”

 

 “……”

 

 나는 몸을 빙글 돌려서 내 뒤를 가로막고 있던 두 사람을 지나쳐, 걸어나왔어. 등 뒤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나는 입을 앙다물고 좀 더 걸었어.

 

 바람이 불었어. 코타로 오시오의 <윈드 송>이 생각이 나네. 바람을 좀 맞다가, 나는 다시 그 친구의 편지를 기억해 냈어.

 

 ‘그렇게 사는 게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살아야 하는 건… 어쨌든 저는 배우로서 작가님의 작품에 출연할 날을 기다립니다. 그것밖에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네요. 결국 종국엔 허망한 결과로 귀결되더라도…’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걷자…

 

 오늘 화이트 데이야.

 

 사탕 많이 받았냐?

 

 흠.

 

 또 편지할게.

 

 

 - 2022년 3월 14일

 - 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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