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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 게임 II (The Mafia Game II) - 12화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저 멀리에서 성양이 걸어오고 있었다. 미끄러운 길 때문에 다소 불편하겠지만서도 굽이 낮은 뾰족 구두가 눈에 띄었다. 이미 빗물이 검은 정장 재킷에 후두둑 떨어져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인사했다.

 

"노란 머리... 괜찮겠지?"

 

그녀는 민망한 듯 중얼거렸다. 나는 "괜찮아." 하고 대답했다.

 

"자, 들어가자."

 

나는 말했고, 우리는 빈소로 들어갔다.

 

한 청년 노동자의 영정 사진 앞으로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양과 나는 절한 다음, 그 젊은 노동자의 부모님과 인사했다. 부모님은 "찾아와주셔서 고마워요." 하고 나지막히 말씀하셨다. 나는 그 분들의 떨리는 눈꺼풀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기타 가방을 내려놓고 성양과 나는 조문객들에게 주는 식사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성양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어떡할거야? 복학할 거야?"

 

"...그래야겠지."

 

"......"

 

"......"

 

"너무 자책하지 마. 지금 여기에 임군(베이시스트)과 조양(드러머)은 안 왔지만, '우리'가-"

 

"......"

 

"'살린' 사람이 더 많아."

 

"......"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알았어."

 

"한야동에서 학교 생활 잘 하고, 졸업 후에 다시 만나."

 

"알았어."

 

나는 성양을 바라보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도 밥이 잘 넘어가지 않는 듯, 육개장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종종 그녀의 노란 머리가 흔들렸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래핑은 훌륭하다.

 

그녀 덕분에, 오늘같은 날에도, 이제 울적한 노래보다는,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을 듣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따라서 인간의 영성(靈性) 또한 사회적인 것, 나에게 그런 깨달음을 알려준 것이 그녀의 랩이었다.

 

2일차 아침 촬영을 앞두고, L은 잠시 회상에 잠겨 있었다. 촬영 스태프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L은 그들을 다소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열심이다... 둥그렇게 앉은 게임 참가자들은 이제 조금 흥분이 되는 듯, 목소리가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L은 그들 또한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또 어디선가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났다. 모두는 깜짝 놀라 소리난 곳을 쳐다보았다.

 

어떤 스태프가 서둘러 움직이다가 바닥에 깔린 전선에 발이 걸렸고, 전선이 위로 붕 뜨며 작은 조명 하나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 스태프는 넘어진 상태에서 떨어진 조명에 다리가 깔렸다. 모두는 후다닥 그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그의 다리를 짓누르는 조명을 모두가 힘을 합쳐 치운 다음, 그의 상태를 살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머리가 아닌 다리 쪽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통 때문에 그만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앰뷸런스 불러!"

 

"여기까지 오려면 꽤 걸릴 텐데."

 

일단 119에 누군가가 전화를 걸었다. L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빠르게 그를 바로눕힌 다음, 그의 셔츠며 벨트등을 풀러냈다. 맥박을 확인했다. 다행히 뛰고 있었다. 호흡도 일단은 하고 있고... 역시 잠시 기절한 뿐인 것 같다. 하지만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공연기획학회원들이 황급히 도착했다. 김군은 쓰러진 스태프의 상태를 재빨리 확인한 후,

 

"다행히 응급처치는 그럭저럭 된 것 같고..."

 

L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린 김군은,

 

"오늘 촬영을 연기할 수 있도록 제가 조치를 취해보겠습니다."

 

하고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군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예. 아이리스 김군입니다. 통화 가능하십니까? ...예. 지금 불의의 사고가 나서... 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 예... ...예. 예. ...진행하라고요?"

 

모두는 깜짝 놀랐다. 낌새가 심상찮았다. 사람이 다쳤는데? 김군은 모두의 시선을 알아채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진짜 면목이 없다. 아, 개판이다. 그리고 김군은 수화기에 대고 있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김군. 어젠 실망이었어요. 잘 생각해, 당신이 예전에, '횡령'-"

 

...이, 이, 이 새끼가... 김군은 눈을 찡그리고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다음,

 

"알겠습니다. 일단은 진행하겠습니다. 뭐,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요."

 

하고 통화를 끊었다. 모두는 김군을 바라보았다. 아, 모두는 어딘가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앰뷸런스 도착하는 대로-"

 

"저는 괜찮습니다."

 

그때, 쓰러진 스태프가 정신을 차렸다. 모두는 반색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신음을 흘리면서도,

 

"아야야... 진, 진행하세요, 학회장님. 연기하면 학회장님도 골치 아플거잖아요."

 

김군은 면목이 없어 더 고개를 숙였다.

 

"합시다."

 

N이 말했고,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는 모두 조심스럽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스태프들도 조금씩 속도를 내었다. "천천히, 천천히!" PD는 이제 애가 타는지 스태프들에게 조심하라고 권유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어쨌든 쇼는 준비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하릴없이 바닷가를 거닐던 때가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말'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도저히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어젯밤, 숙소로 잡은 모텔 안에서 불을 끄고 잠을 청할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말을 거는 바람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잿빛 바다는 나의 우울함을 한층 심화시켜 주고 있었다. 맑은 바다를 기대하고 이 곳에 왔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날씨는 흐렸다. 운도 지지리 '없어'. 나는 백사장에 걸터앉아 궁상맞은 자세로 쪼그렸다.

 

'없어.'

 

'없다'는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돈이 없다. 친구가 없다. 운이 없다. 미래가 없다. 희망이 없다. 연인이 없다. 꿈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뭐지? 나는 대체 왜 태어난 걸까? 우울함이 더욱 심해졌다.

 

"바다다! 꺄악!"

 

어디선가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한 소녀가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큰 밀짚모자를 쓰고 파도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파도가 온다, 피해, 파도가 물러간다, 다가가, 소녀는 신나 있었다.

 

잠시 후, 소녀는 바닷물로 축축해진 모래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흔한 광경이었다. 두 부녀는 그렇게 놀다가 곧 사라졌다. 나는 다시 잿빛 바다를 바라보았다. 곧 배가 고파왔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걸? 나는 어디선가 떡볶이를 사 먹을 요량으로 일어났다.

 

방향을 잡고 걷다가, 소녀가 쓴 글씨를 무심코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벼락을 맞은 듯이 멈춰 섰다.

 

 '바다에서 꽃이 피어나요.'

 

이게, 아까 그 '소녀'가 쓴, '글'이지? 그냥 '아빠 사랑해요' 이 정도일 줄 알았지. 그냥 흔한 광경이라고만 생각했지. 어떻게 이런 감수성을 가질 수 있지? 아, 그래,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라고 누군가가 그랬지...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생각이 물꼬가 트기 시작했다. 데카르트의 저 말이 지금 이 순간에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너무 유명해서 흔한 말이라고만 생각했지? 저게 얼마나 귀중한 말인 줄, 그저 시험 공부 범위로만 생각하니까 오히려 모르는 거야.

 

나는 가방을 황급히 뒤져 펜과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지금 머릿속에서 쏟아지는 말들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괜찮아, 조금 맥락없어도 돼. '바다에서 꽃이 피어나요'라는 말에는 무슨 맥락이 있었어? 나는 지금까지 너무, '갇혀' 있었던 거야. 써 봐, 일단.

 

한참을 그렇게 적고 나자 속이 후련해졌다. 찬찬히 읽어 보니 좀 거칠고, 둔탁했지만, 어딘가 연결되는 지점도 있었다. 꽤 아름다운 연결이었다. 그래, 뭔가, 알 것 같아. 그렇구나, 좋아, 맛있는 떡볶이 먹으러 가자.

 

생각 속에서 말을 거는 수많은 사람들, 실상은 그들이 나를 살리고 있었던 거야. 조금, 알 것 같아.

 

Q는 어느새 눈을 감은 채, 회상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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