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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나 '경찰'이 있다 -

 

 

- 0.

 

‘제사장들은

백성의 죄를 씻는 제물인

속죄 제물을 먹고 살면서

백성이 죄를

더욱 많이 짓기를 바란다.’

 

- 성서, 호세아 4:8 -

 

 

‘그들이 스마야에게 돈을 준 까닭은 나에게 겁을 주어 죄를 짓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려 나를 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성서, 느헤미야 6:13 -

 

 

- 1.

 

 그는 식당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봄을 시샘한다는 꽃샘 추위도 지나가고, 이제 본격적으로 봄과 같은 날씨가 되었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그는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 앞에서는 여러 학생들이 종종걸음으로 지나갔다. 1교시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황망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뭐야, 흔한 백수잖아.’ 하는 눈빛으로 그들의 학우를 흘깃 보았다.

 

 그 중 한 학우가 그에게 다가갔다.

 

 “E. 뭐하냐?”

 

 E라고 불린 그는 그제야 눈빛에 생기가 생기며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수업을 같이 들은 적이 있었던, 아직 그렇게 친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관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E는 지금 상황이 언젠가 겪은 적 있는 것 같다는 생각 - 일명 ‘데자뷰’ 현상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밥 먹을까 말까 고민 중이야.”

 

 “별 걸 다 고민하네.”

 

 E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E의 미소를 보고 ‘친구’는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지으며,

 

 “그런데 E, 춥냐?”

 

 “응?”

 

 “아니, 잠바가 두꺼운데.”

 

 “잠바가?”

 

 “어. 목 폴라까지.”

 

 “으응?”

 

 E는 그제야 주위의 학우들을 보았다. 모두들 한결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자신만 다소 두터운 쥐색 잠바를 입고 있었다. 그렇네. 다소 두터워. E는 뭐라 대답할까 하다가,

 

 “그러게. 좀 춥네.”

 

 “춥다고?”

 

 “……”

 

 “감기 걸렸냐?”

 

 “아니. 아닌데.”

 

 그런데 E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E는 지금 다소 춥다고 생각했다. 봄이 왔는데, 봄이… 왔는데? 지난 주 엠티에서 너무 무리하게 놀았나? E는 고개를 갸우뚱했고, 친구는 가벼운 걱정이 담긴 말을 몇 마디 더 건넨 다음 강의실이 있는 건물 쪽으로 사라졌다.

 

 E는 느릿느릿 일어나서 식당으로 향했다. 식권을 지불하고 밥을 받아서 먹으려는데, 뒤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학우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 들으라고 말한 것 같기도 하다. 소문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식당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다.

 

 “들었어? 그 선배 있잖아. 친구들이랑 맨날 소주에 삼겹살 먹는데.”

 

 “야만인. 어떻게 맨날 삼겹살을 먹을 수 있지?”

 

 E는 반찬으로 나온 제육 볶음을 입에 가져가며 이게 뭔 소린가 잠시 고민했다. 맨날 삼겹살을 먹으면 야만인이야…? 뭐여.

 

 밥을 다 먹은 E는 식판을 제출한 다음, 화장실로 가서 간단하게 가글하고, 머리도 좀 빗고, 식당을 나왔다. 김 교수가 있는 건물까지 걸어가는 동안 눈가에 부서지는 햇살이 따스했다.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걸어오는 학우와는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며 동시에 꼰대 같은 잔소리도 좀 하고 싶다. 그런데 나도 종종 그러니까. 전화 통화를 하며 걸어오는 학우의 말은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 그리고 삼삼오오 무리지어 다니는 학우들 사이에-

 

 김 교수의 오피스 문을 노크하는 E의 손은 약간 떨렸다.

 

 “교수님. E입니다.”

 

 “들어 와.”

 

 E는 들어가서 김 교수에게 간단히 목례했다. 교수는 입으로 빙긋 웃으며,

 

 “사탕 먹을래?”

 

 하고 분위기를 풀었다. E는 단 것을 안 좋아하지만 교수 면전에서 호의를 거절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공손히 사탕을 받았다.

 

 김 교수는 조금 더 분위기를 풀려는 듯, 넥타이도 조금 풀고 어깨에 힘을 빼고 사탕 하나를 입에 까넣고,

 

 “E, 요즘 뭘로 생활하니?”

 

 하고 부드럽게 물었다. E는 그제야 김 교수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눈치 챘다. E는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생활비로 먹고 삽니다. 빠듯하지만…”

 

 ‘빠듯하지만…’은 전략적으로 끼워넣은 말이었다. 그리고 김 교수는 웃었다.

 

 “그래. 너 조교할 생각 없냐?”

 

 “……”

 

 “대우는 섭섭지않게 갈 거다.”

 

 “저, 그런데, 교수님.”

 

 “‘왜 저를?’이라고 말하려고 그랬지?”

 

 “왜, 저, 아, 네.”

 

 “네가 맘에 든다.”

 

 …으잉? E는 잠시 대혼돈의 멀티버스 한 가운데 있는 것 같은 아득한 느낌을 받았다가, 재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나는 편견 없는 사람이니까 당황하지 말자고,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니, 아니, 야, 임마, 교수님의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부려먹기 좋을 것 같다고.”

 

 “…아, 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냐고! E는 속으로 외친 다음,

 

 “그런데 왜 수학과 교수님께서 저를…”

 

 기어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김 교수는 히히, 하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에는 정장 차림이면서 아래는 청바지에, 길거리에서 만 원 주고 샀을 것 같은 운동화… 지금 보니 머리도 부스스하다. 저러고 다니시면 위에서 뭐라 안 하나? 곁가지로는 여러 일화들을 들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자유분방한 인상이다. 김 교수는 대답했다.

 

 “바빠 죽겠는데. 논문은 써야지.”

 

 “예?”

 

 “교수는 논문을 써야 교수지. 논문 쓸 시간이 없어도 논문을 써야 교수지.”

 

 “……”

 

 “논문 쓰느라 왕따 당하면 교수냐? 그래도 논문은 썼으니까 교순가?”

 

 대혼돈, 안녕? 오늘 자주 찾아오네. E는 내면의 달갑지 않은 친구에게 다시 한 번 인사하고 이번에도 가까스로 생각을 정리한 다음,

 

 “그러니까, 논문 쓰시는 데 제가 필요하시단 말씀입…”

 

 “그래!”

 

 김 교수가 갑자기 외쳤고, 또 그 말의 파장에서 굉장히 흡족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에 E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 교수는 이번엔 자신의 책장 근처를 왔다갔다했다. 어, 저 청바지, 약간 닳아 있네, 밑단이. 그리고 운동화도. 저렇게 사뿐사뿐하게 걷는 이유는 아마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일 것이다. 발소리로 피해주기 싫은 것이다. 그 대신 신발에 무리가 많이 간다. E가 그렇게 추리하고 있는 동안, 김 교수는 자신만의 깊은 고민에 빠졌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E. 이렇게 묻자.”

 

 “무엇을…”

 

 E는 잔뜩 긴장하여 김 교수를 바라보았다. 김 교수가 사뭇 진지하게, 눈빛을 이 바닷가 도시 어딘가에 있는 용광로처럼 빛내며 물었을 때, E는 세 번째의 대혼돈을 겪었다.

 

 “E.”

 

 “예.”

 

 “…‘사랑’이란 무엇이냐.”

 

 “……”

 

 “……”

 

 김 교수는 진지하게 E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E는 그런 김 교수를 바라보며, 앞으로 다가올 n차 대혼돈의 갯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 부끄러워 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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