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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과 절망의 경계에서 -

 

 

 

 '눈 내리는 최전방, 나는 노래를 부른다.'

 

 "미쳤냐?"

 

 류광원 병장은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머리를 긁적이고 싶었지만 전투 헬멧을 썼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게 아쉬웠다. 나는 그 대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반문했다.

 

 "제 노래 실력 괜찮지 않습니까?"

 

 "푸하하."

 

 류 병장은 조용히 웃었다. 까불까불거리는 입김이 류 병장을 감쌌다. 나는 마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작게 부르는 건 괜찮을 겁니다. 눈 내리는 소리가 제 노래 소리를 가려주겠지 말입니다."

 

 "책 깨나 읽은 티를 내는군."

 

 류 병장은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그는 전역을 한 달 앞둔 말년, 나는 이제 상병 물호봉. 내가 갓 전입한 이등병이었을 때 그는 갓 상병을 달았었다. 어리바리한 이등병에게 하늘 같은 고참들은 두렵고 신성한 존재였다. 나는 매일같이 혼나고 맞았다. 하지만 류 병장만큼은, 겉보기엔 다소 무뚝뚝해보여도, 인간적인 면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근무조가 편성될 때 나는 그의 부사수가 되길 내심 바랐다.

 

 우리 앞에 있는 철조망은 무심히 눈을 맞는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온갖 방한 용품을 껴입었지만, 최전방의 겨울은 무시무시한 추위를 선사했다. 나는 발을 작게 구르며 동상의 위험으로부터 발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류 병장을 힐끗 보니, 그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런. 근무 중 사수가 졸 때 간부들의 순찰로부터 사수를 지키는 것은 부사수의 몫이다. 나는 전방보다는 좌우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펍!

 

 나는 눈만 꿈뻑였다. 무슨 소리지? 눈 내리는 소리를 뚫고, 멀리서 들려온... 멧돼지가 지뢰라도 밟았을까?

 

 "류광원 병장님."

 

 "......"

 

 "류광원 병장님. 잠깐 일어나시지 말입니다."

 

 "왜. 무슨 일이야."

 

 "지금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뭐?"

 

 "뭔가... 터지는 소리가..."

 

 이때의 류 병장의 태도는 그야말로 신속 간결 정확, 언제 졸았냐는듯이 행동을 개시했다. 헬멧의 턱끈을 풀어 약간 느슨하게 한 후, 통신기를 바로 작동시키고, 수화기를 귀에 갖다댔다. 정보실에서 통신을 받았다.

 

 "단결! 둘하나 소초 병장 류광원입니다. 지금 이상한 소리를 청취했습니다. 아, 네. 뭔가... 야, 지훈아, 소리가 대충 어땠냐?"

 

 류 병장이 잠깐 나에게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예. 뭔가 '펍!' 하고 터지는 소리가-"

 

 "뭔가 '펍!' 하고 터지는 소리라고 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저 안 졸았습니다. 말년인데 겐세이 넣지 마십시오. 하하."

 

 송신이 끝난 후, 류 병장은 다시 헬멧을 고쳐쓰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전방을 주시했다. 우리 앞에 있는 철조망은 무심한 태도로 눈을 맞고 있었다. 잠시 후, 류 병장이 불쑥 말했다.

 

 "불안한데."

 

 "그렇지 말입니다."

 

 우리는 다시 말없이 전방을 주시했다. 눈은 무심하게 내려 철조망을 뒤덮고 있었다. 남에도 북에도, 같은 눈이 내린다. 류 병장이 또 불쑥 말했다.

 

 "예전에 말야, 내가 일병 때, 하나 팔 소초에서 수류탄으로 자살한 녀석이 있었거든?"

 

 "예."

 

 "미친 놈이, 근무지에서 수류탄을 까가지고, 그 위에 엎어진 거야."

 

 "예."

 

 "그게 생각이 나네."

 

 "왜 그랬답니까?"

 

 "몰라. 근데 군대가 소문이 무서운 동네잖아? 예전부터 하나 팔 소초가 분위기 더럽다고 유명했어. 아마 뭔가 있었을 거야."

 

 그때, 통신기가 찌링, 하고 울렸다. 그리고 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류 병장도 뭔가 느꼈는지, 아까처럼 신속 정확하지 않은, 애매한 속도로 수화기를 들었다.

 

 "단결. 병장 류광원... 예. 예."

 

 뭔가 지시를 받았는지 류 병장은 연신 예, 예,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나에게 건네며,

 

 "너 바꾸라는데?"

 

 "저 말입니까?"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단결. 상병 한지훈."

 

 "어, 나 정보과장인데, 방금 뭐 소리 들었다고 했지?"

 

 "예. 맞습니다!"

 

 "못 들은 걸로 해."

 

 "......"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알겠습니다."

 

 통신이 끊겼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류 병장이 나에게 물었다.

 

 "뭐라셔?"

 

 "못 들은 걸로 하라는데 말입니다?"

 

 "......"

 

 그러자, 류 병장의 얼굴이 막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류 병장을 바라보았다. 류 병장은, 시발, 시발, 이 망할 놈의 군대, 이 개새끼들, 개시발씹새끼들, 다 나가 죽어라, 개 썅놈들...! 하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저 류 병장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급기야 류 병장은 헬멧을 벗어 땅바닥에 거칠게 내팽개쳤다. 헬멧은 까랑,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다. 근무지에서 헬멧을 벗는 건 군기 위반이다. 걸리면 영창에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류 병장을 말리지 못했다. 나는 그저 얼음이 되어 전방을 주시했다.

 

 무심한 눈이, 우리 앞의 철조망을 뒤덮고 있었다. 씩씩거리는 류 병장의 눈치를 보며, 나는 문뜩 엉뚱한 생각을 했다. 아마 지금 위에서 내려다보면, 철조망이 보이지 않을 거라는...

 

 멀리서 동이 틀 무렵, 새로운 근무조가 근무 교대를 하기 위해 나타났다. 우리는 그들과 근무 교대를 하고, 소초로 내려왔다. 총기와 탄약을 반납하고,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하고, 샤워를 하는 내내, 류 병장은 입을 앙다물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밤중에 들은 그 소리가 무슨 소리였는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군대는 소문이 무서운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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