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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밤 -

 

 

 

 

 

 세련된 캐롤송이 울려퍼졌다. 크리스마스의 거리는 연인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나는 약속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연락이 없는 그녀를 향해 툴툴거리고 있었다. 그런 어플 따위 믿는 게 아니었어. 백 퍼센트 매칭 좋아하네. 나는 하릴없이 거리를 서성였다. 분출하지 못한 욕망과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외로움과 나만 애인이 없는 것 같다는 소외감이 뒤섞여 나를 괴롭혔다. 그 바람에 나는 다른 누군가와 부딪혔다.

 

 나는 화들짝 놀라 부딪힌 사람을 살폈다. 나와 동갑내기 정도로 보이는 학생이었는데,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 친구는 허리를 굽히며 나에게 사과했고 나도 마주 인사하며 사과했다. 그리고 이번엔 내 눈이 피켓을 향했다.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의 호소…’

 

 피켓에는 굵은 인상의 아저씨가 ‘투쟁’이라고 쓰여있는 머리끈을 조여 매고 외치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나는 피켓을 들고 있는 친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친구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혜지니: 나 이제 끝났어! ㅠㅠ]

 

 그녀였다. 이제야 연락이 온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화난 척 할까? 조금 세게 나갈 필요도 있지. 나는 일단 피켓 친구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웃어준 다음, 핸드폰에 집중했다- 그렇게 메시지를 쓰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껴서 다시 피켓 학생을 돌아보았다. 

 

 그 녀석이 나를 그저 멀뚱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게 내 호의에 대한 보답인가? 나는 기분이 약간 상했지만 꾹 참고,

 

 “힘내라.”

 

 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정치에 좀 관심이 있는 사람이야. 그러나 녀석은 계속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이었다. 나는 슬슬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지만, 다시금 친절하게 웃으며,

 

 “좋은 일 있을거야.”

 

 라고 따뜻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는 일이 벌어졌다. 그 녀석이 갑자기 입술을 오므리더니,

 

 “에휴.”

 

 하고 한숨을 쉰 것이다. 나는 모욕감과 분노로 얼굴 근육이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꾹 참고 몸을 홱 돌렸다. 하여튼 요즘 것들이란. 통 감사할 줄 몰라. 나는 무시하기로 하고 다시 빛의 속도로 핸드폰을 두드렸다.   

 

 [야리: 왜 이제야 연락함?-_-^]

 

 [혜지니: 미아뉴ㅠㅠㅠ 야자감독샘이 휴대폰 다 압수햇오 ㅠㅠ]

 

 [야리: 얼마나 걸림?]

 

 [혜지니: 택시 타고 갈게 ㅎㅎ]

 

 크리스마스엔 뜨거운 밤을… 후후후… 흐뭇하게 웃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훅 불어왔다. 찬 기운이 머릿속으로 찌르르르 전해졌다.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나는 잠시 커피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아메리카노가 오천 원에 육박한다는 사실은 새삼 충격이었지만 잠시 후 나는 주문하신 아메리카노를 들고 창가에 앉았다. 그리고 우수에 젖은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행복해 보이는 수많은 연인들, 재잘거리는 수다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세련된 캐롤송, 오늘도 홀로 있을 내 친구… 문득 한 친구가 생각났다. 그는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이다. 학교 생활이 힘들어서 자퇴했고 그 때문에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나는 녀석에게 문자를 한 통 보내기로 했다.

 

 [야리: 메리크리스마스] 1

 

  우리 사이에 참 낯간지러운 인사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핸드폰을 뒤집어서 테이블에 대충 던져 놓았다.

 

 잠시 후, 나는 핸드폰을 다시 끌어 와 녀석과의 대화창을 열어보았다.  

 

 [날돼: Oda Reiko] 오후 1:10

 

 [야리: (사진)] 오후 1:11

 

 [야리: 이 처자는?] 오후 1:11

 

 [날돼: 아 자꾸 묻지 좀 마. 내 사상과 신념의 자유에 어긋나.] 오후 1:12

 

 [야리: 헐 ㅋㅋㅋㅋ] 오후 1:12

 

 [날돼: 바람 겁나 부네] 오후 4:27

 

[날돼: 이런 날 더 어지러운데 ㅋㅋ] 오후 4:27

 

[야리: 조심해] 오후 4:29

 

 - 2015년 12월 22일 -

 

[야리: 뭐하냐?] 오후 5:31

 

[날돼: 그림 그려] 오후 5:42

 

[야리: 미소녀?] 오후 5:44

 

[날돼: ㅗㅗ] 오후 5:45

 

 -2015년 12월 24일-

 

[날돼: 바람이 왜일케 부는거야?] 오후 4:01

 

[야리: (사진)] 오후 4:07

 

[날돼: 한번만더 스샷 보내면 죽는다??] 오후 4:08

 

[야리: (사진)] 오후 5:10

 

 [날돼: 도ㅗ] 오후 5:52

 

 [야리: ㅗㅗ] 오후 5:52

 

 [야리: 메리크리스마스] 오후 6:07 

 

 이 녀석, 날이 갈수록 예민해진단 말이야.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확 변하면 위험한 거 아냐? 

 

 [혜지니: 혹시 지금 우리집에 올수 있어?]

 

 그녀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 그리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야리: 집에??? 부모님은?]

 

 [혜지니: 여행 가셨어 ㅠㅠ;;]

 

 아이쿠, 저런.

 

 [혜지니: 빨리 와 줘ㅠㅠㅠㅠ]

 

 될 놈은 된다. 지금이 바로 기회다. 나에게도 드디어 영광의 순간이 오는 것이다.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총각 딱지도 졸업한다!

 

 [혜지니: 지금 음식도 하고 있어 ㅎㅎ 빨리 와서 도와줘~~~!]

 

 [야리: 그래 ㅎㅎ빨리 가서 도와줄게]

 

 나는 허둥지둥 코트를 입었다. 커피가 아까웠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커피를 대충 쏟아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집에 가서 밥 먹으면 된다. 마침 배도 고프다. 빨리 가서 음식 하는 것도 도ㅗ와주고…

 

 잠깐, 그 녀석…

 

[ㅗㅗ]이 아니고 [도ㅗ] 오후 5:52 였잖아?

 

도ㅗ…

도ㅗ와

도와

‘도와줄게’?

 

이건 아닌 것 같고.

 

도ㅗ와

도와

‘도와줘.’

 

도와달라고? 

 

에이, 설마…

 

 

 

 

 

 “바람 겁나 부네. 이런 날 더 어지러운데”

 

 

 

 

 

 

 

 

 나는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이 달동네 언덕길은 망할 왜 이렇게 가파르냐! 어쩌면 나는 지금 괜한 헛고생을 하는 걸지도 몰라. 내가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한 것은 아닐까? 내가 타인에게 이렇게 지극 정성인 사람이었나? 

 

 “진현아!”

 

 나는 녀석의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쾅쾅 두드렸다. 아닐거야. 괜한 헛고생이길. 그냥, 친구를 위해 이 정도 헛고생 좀 했다고 나중에 낄낄거릴 수 있기를. 집 안쪽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보통 이 녀석은 늘 혼자 집에만 있다. 나는 숨을 진정시킨 후 귀를 문에 갖다대었다. 안에서 냉장고 같은 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녀석의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더 바짝 귀를 갖다대었다. 그러자 문틀의 금속성 촉감이 내 귀에 얼어붙듯 달라붙었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녀석의 미약한 신음을 들었다. 

 

 이 문을 어떻게 열지? 나는 일단 119에 신고한 후, 무턱대고 위쪽 문틀에 손을 대고 문질렀다. 보통 이런 집들에선 열쇠를 문 근처의 어느 곳에다가 숨겨 놓곤 한다. 그러나 문틀엔 없었다. 나는 손에 새까맣게 묻은 먼지를 털 새도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에 버려져 있는 화분이 눈에 띄었다. 나는 황급히 화분 속을 헤집었다.

 

 

 

 

 

 “학생이 그래도 제때 발견해줘서 다행이야.”

 

 “네…”

 

 “어떻게 진현 학생이 위험하단 걸 알았지?”

 

 “걔 평소에도 어지럽다고 그러긴 했는데… 그냥… 문자를 주고받는데… 오늘따라 뭔가 이상한 것 같아서…”

 

 “하하! 친구들끼리 뭔가 통하나? 역시 젊구나.”

 

 

 

 

 

 병원을 나서니 바람이 훅 불어 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벌써 저만치에서 동이 트고 있었다. 간밤에 나는 달렸고, 쿵쿵 두드렸고, 열었고, 앰뷸런스가 사이렌을 울렸고, 동네 사람들이 관심을 소란으로 표현하고, 엉겁결에 나도 앰뷸런스를 탔고, 병원에 왔고… 몸이 끊어질 듯이 피곤했지만 정신은 말똥말똥했고 그것은 나를 더욱 괴롭게 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택시에 타자마자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역시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멍한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그 피켓 학생이 아직도 있었다. 

 

 나는 기사님께 내려달라고 했다. 택시에서 내려서, 나는 천천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로 걸어갔다. 녀석은 다가오는 나를 발견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이 서늘하고 맑았다. 나는 헛기침을 큼, 하고 물었다.

 

 “안 추워?”

 

 “방금 교대한 거야.”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고 나는 당황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가까스로 피켓에 붙은 사진 속의 인물을 가리켰다.

 

 “이 분은?”

 

 “우리 아빠야.”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갈게. 쉬엄쉬엄해.”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슬그머니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녀석은 역시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모멸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고, 조금 비틀거렸을 뿐이다.

 

 “고마워!”

 

 뒤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외로 밝은 목소리였다. 나는 뒤돌아보고, 녀석에게 손인사했다. 

 

 나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고, 바람에 날려 온 신문지 조각이 내 발에 채였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신문지 조각을 걷어찼다.

 

 누구보다 뜨거운 밤이었다.

 

 

 

 

 

 

2017.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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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일은 지적인 작업이라기보다 육체적인 작업임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짧은 이야기 한 편 쓰는데도 어깨가 빠질 것 같습니다 ㅠㅠ

'예술인 월급제'의 시행이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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