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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내리는 밤 -

 

 

 강의실의 공기는 매캐했고,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칠판에 적혀 있는 글씨를 보고 있었지만 나는 동시에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 곳에 앉아 있지만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게 아니다. 차라리 꾸벅꾸벅 졸면 좋겠지만, 내 머릿속에 어떤 악성 종양처럼 자리 잡은 불안과 염려가 나를 눅눅한 흥분 상태로 내몰았다.

 

"소득의 종류에는 뭐가 있습니까. 이배사근연기, 이자, 배당, 사업, 근로, 연금, 기타 소득! 이건 무척 중요하니까 별표 백만 개 치세요!"

 

 교수가 갑자기 외쳤고, 한 마리 개가 되어 상쾌한 눈밭을 마음껏 질주하던 나는 속수무책이라는 단어에 늘 짓눌려 있는 소심한 학생으로 돌아왔다.

 

 교수는 흘러내린 안경을 끌어올리며 다시 말했다.

 

"자, 여러분, 오늘 짚어 준 포인트들은 반드시, 날밤을 꼬박 새서라도, 필히 암기하셔야 합니다."

 

 엉뚱하게도 나는 숨을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는 도망가고 싶은 걸까? 하지만 어디로...

 

 내가 다시 한 마리 개에게 빙의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그 때 A가 손을 들었다. 교수는 갑자기 손을 든 A를 보고 약간 짜증스런 기색을 내비쳤다. 교수의 안경이 다시 흘러내렸고, 그는 안경을 그대로 둔 채 눈을 내리깔며 A를 바라보았다.

 

 "뭔가?"

 

 "교수님, 방금 무척 중요하다고 하셨는데요."

 

 "그래서?"

 

 "어디에 중요한 겁니까?"

 

 "어디에? 시험에 나오니까 중요한 거지."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까? 그럼 시험에 나오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겁니까?"

 

 "자네 지금 뭐하자는 건가?"

 

 "시험은 중요한 겁니까?"

 

 "난 자네랑 그런 걸로 싸우고 싶지 않네. 내 수업이 듣기 싫으면 당장 나가."

 

 "지금 저는 질문하고 있는 겁니다. 제 질문은 시험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강의실이 일순 술렁였다. 나는 놀란 눈으로 A를 바라보았다.

 

 교수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자네는, 시험을 안 본다고 해도 공부할 텐가? 사람은 강제성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네. 사람은 나약하다. 자네는 안 그럴 거라고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게."

 

 교수가 보기에 A는 전혀 타격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 자리에서는 A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바지를 붙잡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A가 대답했다.

 

 "교수님, 저는 단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공부를 했으며 성인이 된 지금까지 늘 공부를 했습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고 공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며 공부하지 않으면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그 기나긴 공부의 길에는 늘 시험이란 것이 벽처럼 가로 막고 있었지요. 그래, 저 벽만 넘으면 될 거야. 하지만 그 벽을 힘겹게 넘은 후에도 '벽'은 계속 나타났습니다. 더 높고, 더 견고한 모습으로 말이죠. 이 학교도 수능 시험이라는 벽을 넘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또 눈 앞의 벽을 마주하자, 저는 문득 궁금해진 겁니다. 나는 공부하기 위해 태어난 걸까, 아니면 시험을 보기 위해 태어난 걸까.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공부하는 걸까, 아니면 시험 문제를 주어진 시간 동안 빠르게 풀기 위해 공부하는 걸까."

 

 A의 말이 끝나자 강의실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강의실의 분위기를 감지한 교수의 목소리에는 다 숨기지 못한 다급함이 묻어있었다.

 

 "아니 그럼 자네는, 시험이라는 변별력 없이 어떻게 사람을 뽑을텐가? 외모 보고 뽑나? 그냥 딱 봐서 마음에 드는 사람 뽑나? 시험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제도 아닌가?"

 

 "저는 시험 자체가 나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누군가들이 그 시험이란 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컨대 제 말의 요지는..."

 

 A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제 말의 요지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놀라움으로 가득한 침묵이 좌중을 휘감았을 때, 나는 어떤 공기가 내 코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매캐한 공기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그 공기가 내 코를 지나 모든 호흡기관을 통과했을 때, 나는 숨을 쉴 수 있는 권리와 그 권리를 더욱 누려야 할 의무를 오래도록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수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의 호통이 사납게 폭발했다.

 

 "자네 지금! 나를 테스트하나!"

 

 A는 입을 다물었다. A의 눈빛이 많이 담담해졌다. 손을 떨고 있지도 않았다. 

 

 "괜찮은 교수인지 확인할 변별력은 필요하니까요."

 

 A는 말을 끝내고 미련 없는 담백한 동작으로 강의실을 나섰다. 창 밖은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이 회색의 도시를 무자비하게 지워버리기 시작했고 자신만의 오롯한 색으로 가득 물들이고 있었다. 그 변혁의 현장 한 가운데 있는 A의 뒷모습이 나는 어쩐지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후로 캠퍼스에서 A를 보지 못했다.

 

 

2017.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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