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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E 병장님. 이번 수색대 편성에 포함됩니다."

 

"말년에도 가만 놔두질 않네..."

 

엎드려서 책을 읽던 E는 행정병의 통보에 쳇, 쳇, 하고 툴툴거렸다. 저번 주에 중대급 훈련이 있었고 이번 주는 개인 정비 주간, 소대원들에게 휴식을 부여하기 위해 소대 최고참이 대신 뺑이 좀 치라는 얘기다. 너무 아름다운 군대 문화다. 나 때는 무조건 아래서부터 잘랐는데. 쳇.

 

이틀 후, 아주 컴컴한 밤, 소수 정예(?)로 선발된 일곱 명의 소대원과 부소대장은 완전 군장을 하고 연병장에 집합했다. 부소대장의 옆에서는 통신병이 통신 기기를 연신 점검하고 있었고, E는 팔뚝으로 덤벼드는 모기들을 연신 쫓아내고 있었다. 옆을 흘깃 보니, 강 이병은 잔뜩 긴장한 채 빠릿빠릿한 자세로 서 있었다.

 

곧 중대장이 소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나왔다. 모두는 차렷 자세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여름이라 고생이 많을 거다. 다른 소대원들을 위해 조금 희생한다 생각하고, 임무에 충실하며 전우애를 돈독히 다지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이상!"

 

모두는 구호를 외치고 곧 질서정연하게 출발했다. 목적지가 되는 모 산의 일정 루트를 순찰한 후, 모 고지의 야전 진지에서 '매복'한다- 그러니까 조금 더 빡센 경계 근무 임무라고 할 수 있었다.

 

산을 중턱 쯤 올라왔을 때였다.

 

"저기 저 진지에 들어가자."

 

"...자, 잘 못 들었습니다?"

 

부소대장이 갑자기 그렇게 말했을 때, E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부소대장은 지금 산꼭대기에 있는 진지 대신 더 낮은 곳에 있는 진지에 들어가자는 얘기였다. 어차피 보는 사람 없으니, 이른바 '뺑끼'를 부리자는 것이다. E는 난감했다.

 

"안 됩니다. 부소대장님"

 

"괜찮아. 나만 믿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부소대장은 앞서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일순 흐른 좌중의 공기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기색과 함께 약간 머리가 굵은 녀석들은 땡 잡았다는 눈치였다.

 

진지는 협소했다. 모두는 진지 안팎으로 흩어져 경계 근무를 시작했다. E는 곧 후임들에게 이것저것 조용히 말을 걸었다. 오히려 이런 진지한 훈련 상황에서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참 역설이다. 평소에는, 특히 짬이 낮은 이들은 자기 얘기를 할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무를 수행 중인 사병들에게 '동생 같다', '넌 왜 이리 곱상하게 생겼냐' 등, 장난을 빙자한 시비를 걸던 부소대장은, 이내 조용히 쪼그리고 앉아 졸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병들은 눈을 부라리며 어둠 속을 주시... 하면서 동시에 낮은 목소리로 노가리를 까는 신공을 발휘하고 있었다. 마지막 추억이 되겠군. E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며, 동시에 살인 무기들에 잔뜩 둘러싸인 이 속에서 평안함을 느끼고 있는 자신에게 당혹했다.

 

그러나, 이 평안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진지에 비치된 통신기가 찌링, 하고 울렸을 때 부소대장이 무시무시하게 동물적으로 내뱉은 말을 E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좆됐다..."

 

통신병이 통신을 받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통신병을 쳐다보던 부소대장은 결국 고개를 떨궜다.

 

"대대 1본부에서 온 통신입니다."

 

"빌어먹을..."

 

갑작스러운 명령이 떨어졌다. 부소대장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모두는 황급히 짐을 싸고 산을 내려갔다. E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고, 부소대장님아, 나만 믿으라매?

 

중대장은 굉장히 화난 얼굴로 연병장에 서 있었다.

 

"이 새끼야!"

 

중대장은 부소대장에게 무시무시한 욕설을 퍼부었다. 모두는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런데, E는 그 순간에 중대장의 행동이 다소 과장되어 있다는... 그런 기색을 눈치챘다. 이게 바로, 중대장 정도에게는 완전히 압도되지않는 짬밥의 힘- 흐흠, 뭐, 어쨌든-

 

누가 보고 있나?

 

"문책은 내일 날 밝으면 한다. 쉬어!"

 

중대장은 그렇게 명령하고 막사로 사라졌다. 모두는 침울한 기색으로, 다른 소대원들을 깨우지 않게 조심조심 막사로 들어가서, 대충 정리하고 씻고 조용히 침상에 누웠다.

 

다음 날, E는 이등병처럼 빠릿빠릿하게 일어나, 좌정하고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다.

 

"뭐 하십니까? E 병장님?"

 

"다가올 폭풍을 기다리고 있어."

 

곧, 어젯밤 수색에 참여했던 대원들에게 호출이 떨어졌다. 모두는 일사불란하게 중대장실 앞으로 집합했다. E는 대표로,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중대장실 문을 두드렸다.

 

"1중대 3소대 병장 E 외 육 명, 중대장실 들어가겠습니다."

 

"들어 와."

 

모두는 이번에도 일사불란하게 중대장실로 들어가 기립했다. 그리고 E는 다시 긴장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짬밥의 소유자, 행보관이 같이 있었다. 부소대장은 쭈구리마냥 한 쪽에서 조용히 시립하고 있었다. 중대장은 E를 바라보며 물었다.

 

"E."

 

"병장 E!"

 

E는 평소보다 더 빠릿빠릿하게 관등성명을 대었다. 중대장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다음,

 

"어젯밤, 너희는 임무를 어겼어."

 

"예,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그런데 내가 궁금한 건 이거야. 왜 너희는 진지를 바꿔 들어갔나?"

 

어?

그야 당연히 부소대장이 지휘관이었으니까 우리는 시키는 대로-

 

E는 혼란을 느꼈다. 질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E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재빠르게 행보관의 기색을 살폈다. 행보관은 엄숙하게 굳은 얼굴로 E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대답을 더 지체할 명분도 없던 찰나, 중대장이 급한 성미를 이기지 못한 게 오히려 E에게는 다행이었다.

 

"부소대장의 지시였지?"

 

그때, 행보관의 눈이 번뜩였다.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E는 침을 꼴깍 삼켰다. 중대장은 움찔했다. 부소대장도 움찔했다. 그리고 행보관은 E를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너 영창 보낸다, 감히 상관이 물었는데 대답을 안 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E는 무표정한 모습 그대로 서 있다가, 후임들을 흘깃 돌아보았다. 모두의 눈빛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꼿꼿하게 서 있는 강 이병의 눈동자는 작지만 혼란스럽게 요동치고 있었다.

 

"나가 봐."

 

중대장은, 에라 모르겠다, 쟤 내일 모레 전역이니 그냥 이쯤에서 끝내자, 하는 뉘앙스로 말을 내뱉었다. E는 경례했고, 모두는 중대장실을 재빠르게 나갔다. E는 중대장실 벽을 짚고 서서, 자신이 과연 잘 처신한 것인가 잠시 고민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캠퍼스 안의 조그마한 카페에서 잠시 회상에 잠겨 있던 E는, U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선배님. 그러니까, 이걸 손목에 차면 된다는 거죠?"

 

"...어, 맞아. 여기 이 버튼 있지. 이걸 누르면 주위의 소리가 잡혀. 그러면 우리가 들을 수 있어."

 

U는 신기한 듯 통신기를 바라보다가, 그걸 자신의 손목시계 위에 찼다. 그리고 옷 소매로 가렸다. 통신기가 얇고 가늘어서 감쪽같이 감춰졌다. U는 옷 위로 버튼을 한 번 눌러보았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있는 수신기에서 소리가 작게 들려 나왔다. U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런데, 선배님, 이거, 걸리면 어떡해요?"

 

라고 약간의 불안이 스민 어조로 말했다. U는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리며 기색을 살핀 후, 자신의 생머리를 다시 한 번 잘 정돈하고, 나름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E는 그런 U의 모습을 보며, 입을 일 자로 앙다물었다가, 곧 조용히 대답했다.

 

"내가 시켰다고 말해. 어쨌든 맞는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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